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예루살렘은 왜 세 종교의 전쟁터가 되었나?

예루살렘 — 평화를 뜻하지만 갈등의 상징이 된 도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공통된 성지이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끝없이 충돌해온 정치·종교의 중심지.
이 글에서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 종교적 배경, 민족 갈등의 구조를 종합적으로 풀어본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예루살렘은 왜 세 종교의 전쟁터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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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을 처음 마주한 자들은 이 땅을 ‘하느님의 선물’이라 믿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사람들은 이곳을 ‘신의 저주’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둘 사이의 차이는, 불과 수천 년에 불과하다.

물이 부족하고, 흙은 척박하다. 농사는 부적합했고, 방어에는 유리한 지형.
인간이 살기에 알맞은 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성지’가 되었다.
유일신을 믿는 세 종교,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는 저마다 이 도시에 자기 신의 흔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다윗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솔로몬이 첫 성전을 세운 후
유대인들은 이곳을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성전은 두 번이나 파괴되었고, 유대인들은 세계로 흩어졌다.
그 흩어진 마음이 돌아와 울부짖는 곳, 그것이 바로 ‘통곡의 벽’이다.
벽이 지닌 것은 단지 돌이 아니라, 무너진 시간과 꺾인 신앙의 메아리였다.

예수는 이 땅에서 죽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린 피는 신의 사랑을 증명하려 했지만,
그 죽음은 또 다른 종교, 기독교를 낳았다.
예루살렘은 곧 기독교 순례자들의 상징이 되었고,
성묘교회는 그들의 고통과 믿음을 함께 품었다.

이슬람에선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곳에서 하늘로 올랐다고 믿는다.
그들은 황금 돔을 세웠고, 알아크사 사원을 지었다.
이곳은 메카, 메디나에 이어 세 번째 성지가 되었다.

한 도시 안에 세 종교의 가장 거룩한 공간이 공존했다.
그러나 ‘공존’은 단지 단어였을 뿐, 실제로는
세 신앙이 서로를 향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긴장 속에, 도시도, 사람도, 점차 굳어갔다.

1517년부터 약 400년간, 오스만 제국은 예루살렘을 다스렸다.
뜻밖에도 그 시대는 비교적 평온했다.
각 종교는 각자의 공간을 지키며, 대화를 피하는 방식으로 평화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내 대화조차 불가능해졌다.

1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오스만을 무너뜨리고,
영국이 이 지역을 맡게 되었을 때,
그들은 유대인에게 국가를 약속하고, 아랍인에게도 독립을 암시했다.
‘밸푸어 선언’이라 불리는 그 선언은, 결국 같은 공간에 두 개의 미래를 심었다.

유럽에서 박해받던 유대인들은 돌아오기 시작했고,
홀로코스트라는 비극 이후, 국제 여론은 그들의 건국을 지지했다.
반면, 아랍인들은 점점 밀려나며, 삶의 터전 위에 낯선 깃발이 세워지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1948년,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언한다.
곧이어 중동전쟁이 발발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은 수십만 명이 집을 잃는다.

그러나 상실은 외부에서만 오지 않았다.
오랜 망명과 상처 끝에 돌아온 사람들 사이에서도, 방향은 갈라지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내부에서는 두 개의 그림자가 자라났다.
하나는 파타(Fatah).
외교와 협상을 신뢰했던 이들은, 한때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이끌며 독립의 외교적 길을 꿈꾸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고, 그들의 언어는 점차 사람들의 귀에 닿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마스(Hamas).
1987년, 거리의 돌팔매와 분노 속에서 등장한 이 이슬람주의 무장정당은 대화를 거부하고,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정의’를 정의했다.
2006년 총선.
그 해, 민심은 하마스를 선택했고, 땅은 갈라졌다.
서안에는 파타가, 가자지구에는 하마스가 서로 다른 국기를 그리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의 지형은 그대로였지만, 마음속 국경선은 더 깊어졌다.
이제 분쟁은 이스라엘과의 전선만이 아니었다.
무장과 협상, 믿음과 현실, 그리고 정의에 대한 해석.
그 차이는 때로 총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
밖에서는 이를 ‘팔레스타인의 분열’이라 불렀지만,
정작 안에서는 ‘배신’과 ‘정당성’이 맞서는 내면의 전쟁이었다.
누구도 외치지 않았지만, 모두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리끼리도 하나가 되지 못하면서, 어디로 돌아가려 하는가.”

이들은 지금도 ‘돌아갈 권리’를 외치지만, 그 외침은 사막의 바람 속으로 스러진다.

1967년, 이스라엘은 6일 전쟁에서 승리하며 예루살렘 전체를 실효 지배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2천 년 만에 성지를 되찾았다”고 했지만,
팔레스타인과 아랍권은 그것을 “점령”이라 불렀다.
그 두 단어 사이의 의미 차이가, 다시 수천 명의 피를 불러왔다.

성전산(하람 알샤리프)은
유대교에겐 솔로몬 성전의 자리이고,
이슬람에겐 무함마드가 하늘로 올랐다는 사원의 자리다.
이 작은 고원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분화구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형식적으로 이슬람 재단에 관리를 맡겼지만,
극우 유대인들 사이에선 제3성전을 재건하자는 목소리가 자라났다.
출입 통제, 무장 충돌, 고고학 발굴의 명분 아래 감춰진 주권 경쟁.
폭력은 더 정교해졌고, 갈등은 더 오래갔다.

2000년, 이스라엘 정치인 아리엘 샤론이 성전산을 방문하자,
팔레스타인인들은 다시 봉기했고, ‘알 아크사 인티파다’가 시작되었다.
그 봉기는 다섯 해 동안 수천 명의 민간인 생명을 앗아갔다.
종교는 어느새 ‘신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상대방을 없애기 위한 명분’이 되어버렸다.

2017년,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했다.
국제사회는 긴장했고, 팔레스타인과 이슬람권은 분노했다.
충돌은 다시 시작되었다.
유대 극우세력의 성전산 진입, 하마스의 미사일 공격,
그리고 가자지구를 향한 공습.

2023년.
하마스의 전면 공격 이후, 가자지구는 초토화되었고,
도시는 폐허 속에서 신을 불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신은 침묵했다.

예루살렘은 한 민족에겐 ‘신의 약속’이 실현된 곳이다.
다른 민족에겐 ‘빼앗긴 삶’이 시작된 곳이다.
두 진실은 모두 강력했고, 모두 아팠다.

이 분쟁은 단순한 영토 다툼이 아니다.
정체성과 기억, 신앙과 해석,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모호한 복합적 충돌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언제나 신이 있다.
하지만 더 이상 이 싸움은 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정의’라는 이름의 복수가 아니라,
‘공존’이라는 이름의 지혜다.
신이 시험한 것이 믿음이었다면,
우리가 증명해야 할 것은 인간됨일 것이다.

1. 예루살렘: 왜 이 도시는 ‘신의 도시’가 되었는가?

예루살렘은 물도 부족하고, 농업에도 불리한 지형이다.
하지만 이곳은 3대 유일신 종교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모두 자신의 신앙의 정점이자 기원이라고 주장하는 장소다. 그 이유는 각 종교가 이곳을 다음처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유대교: 다윗왕이 정복하고,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하느님의 약속된 땅’
  • 기독교: 예수가 죽고 부활한 곳. ‘성묘교회’는 그 믿음의 핵심이다.
  • 이슬람교: 무함마드가 하늘로 승천한 장소, 즉 성전산(하람 알샤리프)이 존재하는 곳

한 도시 안에 세 종교의 거룩한 공간이 겹쳐 있다.
이는 신성함이 아니라, 충돌의 조건이 된다.

2. 성전산: 세 종교가 충돌하는 중심

성전산(Temple Mount / 하람 알샤리프)은 분쟁의 핵심이다.
같은 장소를 세 종교가 다르게 부르며, 다르게 이해하고, 서로의 존재 자체를 위협한다고 느낀다.

  • 유대교: 솔로몬 성전이 있었던 가장 거룩한 장소 → 언젠가 제3성전을 재건해야 한다는 신념이 일부에 존재
  • 이슬람교: 알아크사 사원(은색 돔), 바위 돔(금색 돔)이 위치한 이슬람 제3성지
  • 기독교는 이 공간보다는 성묘교회 중심이나, 예루살렘 전체를 성지로 본다

이곳은 유대인 입장에서는 접근조차 제한되어 왔고,
이슬람 재단(Waqf)이 관리하고 있지만, 이스라엘 정부가 실질적 통제력을 갖고 있어 주권 충돌의 대표 상징이 됐다.

3. 이스라엘 건국과 팔레스타인인의 상실

  •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독립 선언
  • 1948년 5월 15일: 아랍 국가들이 침공 → 1차 중동 전쟁
  • 결과: 이스라엘 승리, 팔레스타인인 약 75만 명 난민화

유대인에게는 “돌아온 땅”,
팔레스타인인에게는 “빼앗긴 땅”이 된 날이다.

이때부터 팔레스타인은 국가를 잃은 민족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독립과 점령이라는 두 얼굴의 국가가 되었다.

4. 1967년: 예루살렘을 둘러싼 결정적 전환점

6일 전쟁(1967)에서 이스라엘은:

  • 동예루살렘 (요르단이 점령 중이던 지역)
  • 요르단강 서안
  • 가자지구
  • 골란고원 등을 장악

특히 동예루살렘 점령 → 통합 예루살렘 선언은 엄청난 반향을 불렀다.

  • 유대인: “2,000년 만에 성지를 되찾았다”
  • 팔레스타인과 아랍권: “국제법상 불법 점령이다”

예루살렘의 법적 지위는 지금도 국제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외교 쟁점이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아직도 주이스라엘 대사관을 예루살렘이 아닌 텔아비브에 두고 있다.

5. 종교 vs 민족 vs 정치 — 복합 갈등의 구조

예루살렘 분쟁은 단순히 종교 전쟁이 아니다.
아래 세 가지 층위가 서로 엉켜 있다.

  • 종교적 신념: “이곳은 우리 신이 선택한 땅이다”
  • 민족적 정체성: 유대 민족 vs 아랍 민족의 정체성과 기억
  • 정치적 이익: 영토, 자원, 국제외교 전략, 군사 충돌

특히 종교는 정치적 선동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정치는 종교적 신념을 강경화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6. 지금도 계속되는 충돌: 성전산, 트럼프, 하마스

  • 2000년: 아리엘 샤론의 성전산 방문 → 알 아크사 인티파다 발발 (5년간 수천 명 사망)
  • 2017년: 트럼프 정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 → 외교적 지각변동
  • 2023년: 하마스의 대규모 공격 → 이스라엘의 대규모 공습 → 가자지구 파괴

예루살렘은 여전히 역사와 종교, 분노와 기억이 폭발하는 분화구다.

마무리: ‘누가 옳은가’보다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분쟁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분법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수천 년의 기억이 겹겹이 쌓여 있는 이 땅에서, 진실은 언제나 복수형(複數形)이다.

  • 유대인은 성지를 되찾았다고 믿고
  • 팔레스타인인은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고 느낀다

신은 같은 곳에서 세 민족의 기도를 듣고 있다.
이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신을 위하는 싸움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해답을 찾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