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룡(브루스리) 생애

1940년 11월 2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 한 중국인 부부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다. 그의 이름은 이진번(李振藩, Bruce Lee).
당시 그의 아버지 이해천(李海泉)은 광둥오페라 배우로 순회공연 중이었고, 아들의 출생지는 우연처럼 미국이었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아이”라는 신분은 훗날 그에게 이중적인 정체성을 부여하게 된다.
그러나 이 아이는 단순한 유산자(有産者)가 아닌, 운명을 뚫고 세상을 바꿀 존재였다.
부모는 곧 이소룡을 데리고 홍콩으로 돌아왔다.
이소룡은 다섯 살 때부터 영화에 출연하며 아역배우로 활약했고, 이미 2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 경험을 갖게 된다. 하지만 스크린 속 귀여운 소년은 거리에서는 자주 싸움에 휘말리는 불량 청소년이었다.
홍콩의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자연스레 무술에 손을 댄다.
그리고 한 인물이 그의 삶을 바꾸게 된다.
바로 엽문(葉問) — 영춘권의 대가.
엽문에게 무술을 배운 것은 단순히 싸움의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었다.
영춘권은 곧 마음의 수련이었고, ‘자신을 비우는 무술’이었다.
이소룡은 육체적 수련과 더불어 철학에도 심취했고, 동양과 서양 철학을 넘나들며 자기만의 무도(武道)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홍콩 거리에서 싸움이 잦아지고 경찰과도 마찰이 생기자, 그의 부모는 결단을 내린다.
“진번을 다시 미국으로 보내자. 이곳에선 오래 못 버틸 거야.”
1959년, 18세의 이소룡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 시애틀에 정착해 식당에서 알바로 생계를 꾸려가며 고등학교를 마쳤고, 이후 워싱턴 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한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무술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가 창시한 것은 ‘절권도(Jeet Kune Do, intercepting fist)’, 형식이 없는 형식, 자유로운 유연성의 무도였다.
여기서 그는 린다 에머리(Linda Emery)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 후 두 아이(브랜든과 섀넌)를 낳는다.
이소룡은 미국 TV에서 ‘그린 호넷’의 카토 역할로 등장하며 유명세를 탔지만, 주류 할리우드의 벽은 높았다.
동양인은 언제나 조연, 악당, 무명인물일 뿐이었다.
이소룡은 “내 이야기를 내가 만든다”는 각오로 직접 제작에 나섰고, 결국 홍콩에서 자신의 영화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된다.
그리고 그 선택은 역사적 대전환점이 된다.
1971년, 《당산대형》은 홍콩을 강타하며 대흥행에 성공했다.
이후 《정무문》, 《맹룡과강》,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리우드와 공동 제작한 《용쟁호투》는 이소룡을 단숨에 국제적인 액션스타, 무술 철학가, 반문화 아이콘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몸놀림은 춤 같았고, 철학 같았고, 혁명이었다.
그는 단지 액션 배우가 아니라, 문화적 경계를 넘는 ‘철학하는 무도인’이었다.
하지만 전성기는 너무도 짧았다.
1973년 7월 20일, 이소룡은 갑작스럽게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3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공식 사인은 약물 알레르기 반응에 따른 뇌부종, 그러나 타살설, 음모론, 가문의 저주, 중독설 등 수많은 루머가 그의 죽음을 둘러쌌다.
죽음조차 신화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내였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이소룡은 단지 액션 배우가 아닌, ‘경계를 허문 자’, ‘동양인 정체성의 상징’, ‘철학적 전사’로 기억되었다.
그가 남긴 말은 여전히 전 세계 젊은이들의 마음에 울림을 남긴다.
“Be water, my friend.”
“물이 되어라, 친구여.”
– 이소룡(브루스리)
에필로그
그의 인생은 짧았지만, 그가 남긴 흔적은 시대를 초월했다.
그는 ‘몸으로 철학한 사람’, ‘주먹으로 세상을 두드린 사상가’였고, 그 누구보다 뜨겁게 살고, 가장 짧게 타오른 별이었다.
홈페이지 링크: 브루스리(brucel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