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윤발, ‘영웅본색’ 전설에서 1조 기부 선언까지 — 시대를 품은 홍콩 배우의 모든 것

주윤발(周潤發, Chow Yun-fat)은 단순한 스타가 아니다. 그는 홍콩 영화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상징이며, 강한 남성성과 처연한 고독을 동시에 품은 배우다. 《영웅본색》의 마크부터 1조 원대 재산 기부 선언까지, 주윤발은 시대를 관통한 ‘신념의 배우’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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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촌 소년에서 배우가 되기까지: 주윤발의 시작

1955년 5월 18일, 홍콩 란타우 섬에서 태어난 주윤발은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선착장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가정부로 생계를 책임졌다. 학업을 중단한 그는 우유 배달, 카메라 판매, 호텔 종업원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1973년 TVB 방송국의 연기자 훈련 프로그램에 지원하면서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준수한 외모 덕분에 멜로드라마에 출연했지만, 무명 시절은 길고 고독했다. 그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작품은 1980년 드라마 《상해탄》(The Bund)이다. 그는 청년 갱단의 중심 인물 ‘허문강(許文強)’ 역을 맡아, 정감과 비극을 함께 지닌 인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이 드라마의 폭발적인 인기는 곧 영화계 진출로 이어졌다.

‘영웅본색’으로 상징되는 배우, 주윤발

1986년, 오우삼(John Woo) 감독과 함께한 《영웅본색》(A Better Tomorrow)은 그의 인생을 바꿨다. 트렌치코트에 선글라스를 쓰고, 입에 이쑤시개를 문 채 등장한 ‘마크(Mark)’는 아시아 액션 영화의 새로운 아이콘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진짜로 보여준 건 ‘쿨함’이 아니라, 무너진 세계에 대한 깊은 애도였다. 《첩혈쌍웅》(The Killer, 1989), 《첩혈속집》(Hard Boiled, 1992)에서도 그는 “총을 든 철학자”처럼, 폭력의 미학 너머 인간적 슬픔을 표현했다. 오우삼 특유의 느린 총격씬 속에서, 주윤발의 눈빛은 조용히 무너진 세계를 애도하고 있었다.

그의 액션은 힘보다는 절제였고, 분노보다는 비애에 가까웠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는 동시대 헐리우드 배우들과 전혀 다른 깊이를 보여주었다.

헐리우드 진출과 《와호장룡》의 재도약

1990년대 후반, 그는 영어를 익히며 헐리우드에 도전했다. 1998년 《리플레이스먼트 킬러》(The Replacement Killers)로 미국 데뷔를 치르고, 이듬해 《애나 앤드 킹》(Anna and the King)에서는 조디 포스터와 함께 주연을 맡았다.

그러나 헐리우드는 그의 진가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 동양적 클리셰에 갇힌 캐릭터들, 단선적인 액션 이미지로 인해 그는 예술적 에너지를 온전히 발휘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Crouching Tiger, Hidden Dragon)에서 그는 다시 빛났다. ‘리무바이’ 역을 맡은 그는 절제된 무공과 깊은 고뇌, 무언의 사랑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전 세계 관객의 찬사를 받았다. 그는 정서의 연기자로 다시금 자리매김했다.

수천억 재산 기부 선언 – 삶으로 존경받는 스타

주윤발이 주목받는 이유는 연기력만이 아니다. 그는 수천 억대 자산가이면서도,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길거리 음식도 즐긴다. 17년 넘게 구형 휴대폰을 사용했고, 한 달 생활비로 단 몇 만 원만 썼다고 알려져 있다.

2010년, 그는 “사후에 전 재산의 99%를 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8억 5,600만 홍콩달러였던 자산은 아내 천후이롄의 뛰어난 부동산 투자 덕분에 2018년에는 약 56억 홍콩달러, 한화로 약 1조 원 규모로 증가했다.

그는 사회적 정의에도 조용히 목소리를 보탰다. 2014년 홍콩 민주화 시위 당시 학생 시위대를 공개 지지하며 “그들은 감동적이고 용감하다”고 말했다. 2019년 복면금지법 시행 후에는 검은 마스크를 쓴 채 시위 현장에 등장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에게 ‘홍콩의 얼굴’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다.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 기자회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빈손으로 세상에 왔으니, 떠날 때 빈손이어도 괜찮죠. 점심과 저녁에 먹을 흰 쌀밥 두 그릇이면 충분합니다.”

그는 스타이기 전에 인격이 깊은 사람이다. 그래서 스크린이든 일상이든, ‘믿음’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배우

주윤발은 지금도 연기를 사랑한다. 2018년 《무쌍》(Project Gutenberg)에서는 절제된 카리스마와 입체적인 악역 연기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최근에는 카메라를 들고 홍콩의 새벽 거리를 걷는다. 그는 조용한 풍경을 자신의 시선으로 담아내며, 은막 너머 또 다른 예술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커리어는 액션, 누아르, 무협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하나의 장르였고, 동시에 하나의 시대였다.

그의 얼굴에는 총성이 있다. 그러나 그 총성은 증오가 아니라, 무너진 세계를 향한 침묵의 애도였다. 그가 구축한 캐릭터의 본질은 폭력보다 슬픔에 가까웠고, 그래서 더욱 아름다웠다.

‘주윤발’이라는 이름은 총을 든 남자, 슬픔을 품은 전설, 인간에 대한 연민을 담은 배우로서 언제나 관객의 마음 속에서 조용히 살아 숨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