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보이 이우진과 오대수 그리고 오이디푸스 ― 운명 앞에 선 세 남자

올드보이 이우진과 오대수 그리고 오이디푸스 ― 운명 앞에 선 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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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다. 그 안에는 인간이 마주한 비극적 운명, 기억의 역설, 그리고 죄의 자각이라는 무거운 질문들이 촘촘히 얽혀 있다. 특히 이 작품의 핵심 인물인 이우진과 오대수, 그리고 고대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의 오이디푸스는 서로 다른 시대와 이야기 속에 살지만, 한 가지 공통된 질문을 향해 나아간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저질렀는가?”

운명을 설계한 자 ― 이우진 vs 오이디푸스의 신

《올드보이》에서 이우진은 오대수를 감금하고 조작된 복수를 설계한 인물이다. 그는 단지 감정을 분출하는 피해자가 아니라, 마치 신처럼 복수극 전체를 기획하고 연출한다. 모든 퍼즐 조각을 맞춰놓은 그의 복수는, 단순히 분노의 발산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산된 운명의 시나리오다.

이는 《오이디푸스 왕》에서 인간을 실험하듯 예언을 던지는 신의 위치와 유사하다. 신은 오이디푸스에게 “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 말한다. 이 예언은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예정된 비극으로 수렴된다.

→ 이우진은 복수를 통해 신의 위치에 서고자 한 인물이며, 오대수는 그 신의 계시 속에서 스스로 진실을 향해 걸어간다.

진실을 찾는 자 ― 오대수 vs 오이디푸스

오대수와 오이디푸스는 모두 자기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실을 추적하는 자들이다. 두 사람 모두 처음에는 정의감으로 움직인다. 오대수는 누군가에게 복수하고자 하고, 오이디푸스는 도시의 저주를 풀기 위해 진실을 찾아나선다.

하지만 그 여정의 끝에서 마주한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진실을 알게 되자, 자신의 눈을 찌르고 자발적으로 망명을 택한다.
  • 오대수는 자신이 사랑한 여자가 자신의 딸이라는 끔찍한 진실 앞에서 기억을 지우는 선택을 한다.

→ 두 인물 모두 “자기 인식”의 순간에 이르지만, 감당할 수 없는 진실 앞에서 육체적 파괴(눈)와 심리적 삭제(기억)라는 방식으로 자기를 무너뜨린다.

죄의 무게 ― 죄를 저지른 자는 누구인가

이우진은 누이와의 근친상간이 발각된 일로 인해 가족을 잃고, 오대수에게 그 원인을 돌린다. 하지만 영화는 이우진의 복수가 정당했는지를 묻는 대신, “말의 무게”, 기억의 윤리에 주목한다. 오대수는 기억도 못 하는 말 한마디로 누군가의 인생을 무너뜨렸고, 그 대가로 자신의 인생이 파괴된다.

이 구조는 오이디푸스의 운명과 정확히 겹친다. 오이디푸스 역시 죄를 지은 줄 모르고 죄를 저지른다. 그리고 그 죄를 알게 된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왕’이 아닌 죄의식의 화신으로 전락한다.

→ 이우진은 심판자이자 신, 오대수는 희생양이자 죄인, 오이디푸스는 심판받는 자이자 스스로를 처단하는 자이다.

미소와 절망 ― 결말의 철학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오대수는 최면을 통해 딸과의 기억을 지운다. 그리고 그녀 앞에서 울면서도 웃는다. 이 미소는 단순한 해피엔드가 아니다. 그 안에는 모든 것을 알지만, 다시 모른 척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모순이 담겨 있다.

이 장면은 오이디푸스가 진실을 알게 된 뒤 눈을 찌르고, 먼 땅으로 떠나는 결말과 맞닿아 있다. 죄는 이미 지워질 수 없으며, 기억은 잊힌다 해도 존재는 지워지지 않는다.

→ 그래서 박찬욱의 “올드보이”는 단순한 복수극이 아닌, 오이디푸스적 질문 ―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저질렀는가” ― 에 대한 현대적 응답이다.

마무리하며 ― 세 사람의 비극이 말하는 것

이우진, 오대수, 그리고 오이디푸스.

세 인물은 각기 다른 위치에서 인간 존재의 심연을 비춘다. 복수의 설계자, 진실의 탐색자, 운명의 희생자. 하지만 결국 그들은 모두 스스로의 무지, 욕망, 과거에 의해 파멸한다. 그리고 관객은 묻게 된다.

“기억을 지우면 죄도 사라지는가?”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인간은 자유로워지는가, 아니면 속박되는가?”
“우리는 진실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

《올드보이》는 이 질문을 오이디푸스보다 더 직접적이고 고통스럽게 던진다.
진실은 때때로 정의보다 잔혹하며, 용서보다 더 무거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