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다. 이 영화는 억압된 기억, 죄의식, 통제 불가능한 욕망, 그리고 인간 존재의 모순된 본성에 대해 날카롭게 파고드는 작품이다.
영화 올드보이 정보
- 영제: Oldboy
- 장르: 드라마, 미스터리, 범죄, 스릴러
- 감독: 박찬욱
- 원작: 만화
- 네이버 평점: 9.33
- 개봉: 2003년 11월 21일
- 러닝타임: 2시간
- 채널: TVING, NETFLIX, WATCHA, coupang play, wavve, APPLE TV+
영화 올드보이 출연진
- 오대수 – 최민식
- 이우진 – 유지태
- 미도 – 강혜정
- 경호실장 – 김병옥
- 철웅 – 오달수
- 최면술사 – 이승신
- 수아 – 윤진서
- 주환 – 지대한
- 소년 대수 – 오태경
- 소년 우진 – 유연석
- 소년 주환 – 유일한
영화 올드보이 줄거리

아무도 그를 주시하지 않았다. 대수는 그저 술에 취해 있는 한 명의 평범한 가장이었다. 경찰서 유치장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딸의 생일을 말하는 그의 모습은, 누가 보기에도 하찮고, 위태롭고, 그래서 잊히기 쉬운 존재였다.
하지만 사라진 것은 단 몇 분 사이였다. 친구가 전화를 걸기 위해 잠시 눈을 뗀 사이,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 그는 낯선 공간에 있었다. 철문과 벽지, 좁은 침대, 창문 하나 없는 방. 그리고 텔레비전. 그것이 오대수가 새롭게 맞이한 세계의 전부였다.
그에게는 이유를 알려주는 자도, 항변할 수 있는 권리도 없었다. 감금은 조용히, 치밀하게, 그러면서도 무심하게 진행되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흘러나오는 멜로디, 그 직후 방 안을 가득 채우는 가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 바뀌어 있는 옷과 잘 정돈된 방. 반복되는 이 패턴 속에서 대수는 천천히 무너져갔다. 마치 실험용 쥐처럼.
1년이 지났을 때, 그는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자신의 아내가 살해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범인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는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죽고 싶다는 충동은 강해졌지만, 그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15년이라는 시간. 그것은 인간이 살아남기에는 너무도 잔혹한 길이었고, 그의 내면은 이미 산산조각 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적응은 때로 공포스럽다. 그는 결국 버텨냈다. 아니, 버텨야만 했다. 손톱으로 벽을 긁고, 주먹을 단련하며, 복수의 감정을 껴안은 채 그는 자신만의 시간을 쌓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 방에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풀려난다.
이유도 알 수 없고, 목적도 모호했다. 그저 한순간의 자유. 그는 우연히 들른 일식집에서 젊은 여성 미도를 만나게 되고, 그녀는 대수가 감금 당시 작성한 자서전을 읽고 연민의 감정을 품는다. 이 감정은 곧 사랑으로 변모한다. 하지만 대수의 마음속에는 오직 하나의 질문이 존재했다. “왜 나를 가두었는가?”
그는 감금된 동안 먹은 군만두의 맛을 단서로 삼아 범인을 추적해간다. 수십 곳의 중국집을 돌아다니고, 드디어 자신이 갇혀 있던 방의 위치를 찾아낸다. 그리고 마침내, ‘이우진’이라는 이름에 도달한다. 이 남자, 대수의 고교 동창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퍼즐 조각은 조금씩 맞춰지기 시작한다.
우진은 놀라울 만큼 침착했다. 그에겐 분노도, 조급함도 없었다. 단지 하나의 게임만이 존재했다. “내가 당신을 왜 가두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야 합니다. 5일 안에.” 게임의 대가는 우진의 ‘자살’이었다. 대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영화 올드보이 결말

그리고 기억의 조각은 과거로 향한다. 고등학교 시절, 대수는 우진이 누나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된다. 그는 그 사실을 친구에게 농담처럼 흘렸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소문은 눈덩이처럼 커졌고, 결국 우진의 누나는 자살한다. 복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우진은 15년간의 감금을 통해 대수에게 가족을 잃는 고통, 무기력함, 그리고 외로움을 강제로 경험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복수의 서막이었다. 대수가 사랑하게 된 미도. 그녀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모든 진실은 파멸로 변했다. 그녀는 바로 대수의 딸이었다. 15년 동안 자라난 딸의 사진이 담긴 앨범을 펼친 그 순간, 대수의 세계는 붕괴한다.
우진은 미소를 지었다. “왜 당신을 지금 풀어주었는지, 이제 알겠지?”
대수는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스스로 혀를 자른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딸의 인생이라도 지키기 위해. 우진은 복수의 끝에서 자살을 택한다. 남겨진 대수는 최면술사를 찾아가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한다.
모든 기억이 사라진 후, 미도는 대수를 껴안고 말한다. “사랑해요.”
대수는 웃는다. 하지만 그 미소 너머, 그는 알고 있다. 결코 지워지지 않을 감정이 가슴 깊숙이 남아있음을.
박찬욱 감독 복수 3부작
영화 올드보이 해석

영화가 끝났을 때, 나는 말문이 막혔다.
오대수가 혀를 잘라낸 그 장면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 전체가 내 안의 무의식을 발가벗겨 보는 듯한 불쾌함과 황홀함을 동시에 줬기 때문이다.
《올드보이》는 말 그대로 ‘정신의 감옥’에 갇힌 인간의 이야기를 한다.
15년의 감금, 기억보다 무거운 침묵
처음부터 질문은 명확하다.
“누가, 왜 나를 감금했는가?”
그러나 더 깊은 질문은 그 아래에 숨어 있다.
“나는 그 감금 이전에 누구였는가?”
15년간 오대수가 갇혀 있던 방은 단순한 물리적 감옥이 아니다.
그건 죄의식과 기억, 그리고 망각의 감옥이다.
TV로 세상을 보고, 독백하며 미쳐가던 그 시간은 오히려 자신이 ‘무엇을 잊고 있었는지’에 집중하게 만드는 의식의 고문과도 같다.
그리고 이 지옥을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이우진.
하지만 그는 복수마저도 은밀하게, 정교하게 실행한다.
그가 원하는 건 오대수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오대수 스스로 깨닫게 만드는 것.
이 점에서 이 영화의 진짜 공포는 육체적 폭력이 아니라 심리적 폭로에서 나온다.
망각의 은유, 선택된 무지
이우진은 복수의 동기로 오대수의 ‘말’을 지목한다.
“너 그 소문 퍼뜨렸지?”
그 한 마디, 가벼운 농담 같은 험담이 이우진의 인생을 무너뜨렸고, 그는 같은 방식으로 오대수를 파괴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여기서 감독은 질문을 확장한다.
우리는 진실을 원할까, 아니면 잊고 싶은가?
영화 내내 오대수는 기억을 좇는다.
그러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그는 차라리 그걸 몰랐더라면 좋았을 것이라 절규한다.
“누구냐? 너?”
“모르는 게 나았을 텐데요.”
이 대화는 단순한 플롯 전개가 아니다.
그건 우리 자신에게 묻는 무의식적 자위와 진실에 대한 거부의 역설이다.
실제로 영화의 마지막, 오대수는 다시 최면을 통해 ‘망각’을 선택한다.
그건 죄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일까?
아니면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진실 앞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자기 보호일까?
근친상간과 운명의 덫
영화의 핵심 플롯인 아버지와 딸의 근친상간은 관객에게 극한의 충격을 준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금기나 자극적인 설정이 아니다.
오히려 이 구조는 감정과 윤리, 그리고 인간 본능 사이의 충돌을 극대화시키는 장치다.
오대수는 사랑에 빠진다.
그 사랑이 자신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그 감정은 너무나도 진실하고 절실하다.
그러나 진실을 안 뒤에도, 그는 여전히 그 감정을 지우지 못한다.
그래서 혀를 잘라 ‘말’을 없애고, 최면을 통해 기억을 지운다.
사랑과 죄, 본능과 이성,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그는 무너진다.
그 파괴된 인간성, 그 무력감 속에서 감독은 거대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윤리적 존재인가, 아니면 환경과 기억이 만들어낸 가면인가?”
이우진: 악당이 아닌, 거울
이우진은 ‘악’으로 위장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감정, 복수, 통제 욕망이 응축된 인간의 또 다른 얼굴이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 고통을 정교하게 연출하며 스스로의 예술로 소비한다.
그의 복수는 잔혹하면서도 유려하다.
레이저 리모컨으로 오대수를 조종하는 장면은 통제의 쾌감과 인간을 ‘연극의 대상’으로 다루는 권력적 시선이 응축된 미장센이다.
영화가 끝나고, 관객이 느끼는 불쾌함은 단지 오대수가 조종당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 역시 누군가의 시선과 기억, 혹은 권력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불안에서 비롯된다.
최면 – 기억은 조작된다, 진실도 변형된다
최면은 이 영화에서 단순한 장치가 아니다.
그건 ‘기억’이라는 개념 자체가 얼마나 취약하고 유동적인지를 상징한다.
최면을 통해 감정을 지우고, 기억을 바꾸고, 심지어 사랑조차 조작된다.
그건 끔찍하지만 동시에 현실적인 질문을 낳는다.
“우리는 정말로 스스로를 알고 있는가?”
“내 감정은 내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각인된 환상인가?”
결국 영화는 인간의 정체성조차 조작 가능한 구조물임을 시사한다.
결말 – 웃는가, 울고 있는가
눈 덮인 산 속에서 오대수는 앉아 있다.
“나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는가?”
그의 얼굴은 웃고 있지만, 눈물은 흐르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끝나지만, 그 질문은 관객의 뇌리에 깊이 박힌다.
기억을 잃고 다시 사랑하는 것과, 진실을 안 채 살아가는 것 중 무엇이 더 고통스러운가?
《올드보이》가 묻는 존재론적 질문
《올드보이》는 단순히 ‘누가 누구에게 복수했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다.
그건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 기억, 죄의식, 사랑, 통제—가 어떻게 서로 충돌하며 무너지는가에 대한 서사다.
오대수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다.
그는 이미 그 안에 파괴의 씨앗을 품고 있던 인물이다.
이우진은 단순한 가해자가 아니다.
그 역시 사랑을 잃고 고통 속에서 무너진 인간이다.
결국 《올드보이》는 이렇게 묻는다.
“너는 네 과거를 온전히 기억하는가? 그 기억을 안 채, 지금의 너를 사랑할 수 있는가?”